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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야기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名醫) 화타(華陀)... 최고 권력자 조조(曹操)와 화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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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설적인 명의(名醫) 화타(華陀)...

최고 권력자 조조(曹操)와 화타의 죽음

 

 

오늘은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名醫)였던 화타(華陀)의 이야기를 펼칩니다.

 

고대(古代) 중국의 역사(歷史)에는 걸출한 의사(醫師) 두 분이 계셨습니다.

◈ 주(周) 왕조시대의 인물인 편작(扁鵲)과

◈ 한(漢)나라 말기(末期)에 이름을 떨쳤던 화타(華陀)가 바로 그들입니다.

 

오늘은 화타(華陀) 선생에 대해 짚어 보겠습니다.

화타(華陀) 선생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현재의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화타(華陀)가 고대 중국(中國) 역사 (歷史)속에 가장 뛰어난 명의 (名醫)로

추앙(推仰)받는 이유(理由)는 약(藥), 침(鍼), 뜸(灸) 등 한의학 전반에 걸쳐

정통(正統)했을 뿐 아니라 인체를 마취(痲醉)시켜 외과수술 (外科手術)을

처음으로 시행(施行)한 의사(醫師)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개발한 마비산(麻沸散)은 오늘날의 마취제(痲醉劑)와 비슷한 개념의

약물이었는데, 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수술 전에 마취시켜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 획기적인 약물(藥物)이었습니다.

 

화타(華陀)는 양생술(養生術)에도 매우 밝아서 100세(歲) 가까운 나이에도

장년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화타(華陀)가 명의로 이름을 떨치자 동향 출신으로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조조(曹操)가 화타를 자신의 곁에 두고 병(病)을 돌보게 했습니다.

 

조조(曹操)는 당시 심한 두통(頭痛)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화타(華陀)는

조조에게 두통을 치료(治療)하기 위해서는 예리(銳利)한 칼로 머리를 갈라

환부(患部)를 도려내는 수술(手術)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조조(曹操)는 화타가 자신을 죽이려는 수작을 펴는 것으로 오해(誤解)하고

화타(華陀)의 제안 (提案)을 거절 (拒絶)했습니다. 이 때부터 화타는 조조의

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굳힙니다.

 

어느날 화타는 얼마동안 휴가(休暇)를 얻어 고향(故鄕)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부인(夫人)의 병을 핑계로 조조(曹操)의 부름이 계속되었음에도

가지않고 버텼습니다.

 

의구심에 꾀돌이 조조(曹操)가 화타(華陀)의 뒷 조사(調査)를 해 보았더니,

화타의 부인(夫人)은 병(病)은 커녕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조조(曹操)는 불경죄(不敬罪)로 화타(華陀)를 잡아와서 감옥에

가두고 심한 고문(拷問)을 가한 뒤 사형(死刑)을 시키라고 명합니다.

 

이 시점에 조조(曹操)가 무척 아끼던 아들이었던 조충(曹沖)이 중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頃刻)에 이르렀습니다.다급해진 조조가 형장으로 사람을 보내

화타의 사형을 멈추라고 했으나 이미 사형 집행이 끝난 후였습니다.

 

조조(曹操) 아들 조충(曹沖)도 화타(華陀)가 사형(死刑) 집행(執行) 당했던

그날 1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조조는 땅을 치고

후회를 했습니다.

 

특히, 화타(華陀)는 오금희(五禽戲)라는 운동법(運動法)을 창안(創案)하여

양생술(養生術)을 가르쳤는데 팔, 다리의 관절(關節)을 여러 방향(方向)으로

움직여 혈액순환(血液循環)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늙음을 방지(防止)하는

방법(方法)이었는데, 그 시대에 큰 반향(反響)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시대(時代)를 풍미(風味)했던 거인(巨人)은 갔지만 그가 남긴 족적(足跡)은

후학(後學)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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