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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인삼에 대한 역사적 고찰... 인삼의 원조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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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인삼에 대한 역사적 고찰...

인삼의 원조는 어디?

 
 

​한반도에 인삼의 자생은?

한반도에서 인삼의 자생은 BC 2070년 전후였던 삼황오제 때로 소급된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기원전(紀元前) 10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중국(中國) 양나라 시대에 ‘남조도사(南朝道士)’라는 별칭(別稱)을 가졌던
도홍경(陶弘景, 456~ 536)이 쓴 ‘명의별록(名醫別錄)’에서는 “삼(蔘)은
백제(百濟) 산(産)을 소중히 여기는데 외형상 가늘고 단단하며 희다.
기운과 맛은 상당(上黨)산보다 박하다.
그 다음으로는 고려(高麗) 산(産)을 쓰는데 고려는 바로 요동(遼東) 이다.
외형은 크며 허하고 연해 백제산(百濟産)보다 못하다. 실제로 쓰기에는
모두가 상당(上當) 산(産)만 못하다.”라고 기록되었다.

사실 상당삼 (上當蔘)은 중국(中國) 고전(古典)의서(醫書)에서 살펴보면
인삼(人蔘)이 아니라 만삼 (蔓蔘)이었으며, 만삼을 일명 당삼(黨蔘), 혹은
양유(羊乳)라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중국(中國)처럼 무조건 삼(蔘)이라고 하지 않고,
◈ 현삼(玄蔘= 심회초 혹은 능소초),
◈ 고삼(苦蔘= 너삼),
◈ 단삼(丹蔘= 奔馬草),
◈ 사삼(沙蔘= 잔대) 및
◈ 인삼(人蔘)으로 세분(細分)했다.

한반도 인삼(人蔘)이 중국 왕실과 귀족들에게 귀중한 약제로 사용되었다.
 
신당서(新唐書)에 621(진평왕43)년 7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唐)나라에
입조(入朝)했다는 기록(記錄)이 있고,
구당서(舊唐書)에서 따르면 입당(入唐) 때 신라(新羅) 방물로 금(金), 은,
조하주(朝霞紬), 인삼(人蔘) 등을 진공(進貢)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왕은 사신(使臣)을 대 당나라
고조에게 방물로 조공을 했다(王遣使大唐朝貢方物).”는 기록이 있다.
뒤이어 723(성덕왕 22)년 4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 조정에 들어 올 때에
우황, 인삼, 조하주, 금, 은 등을 진공했다.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해 당(唐)나라 고급관리를
지냈던 최치원(崔致遠, 857~900)의 ‘계원필경(桂園筆耕)’에서는 생일날
상관에게 진상했던 물목(獻生日物狀)에 신라방물인 인삼이 들어있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인삼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이어 신라(新羅)가 일본(日本)에 수출(輸出)했던 752년 물목(買新羅物解)
에서도 60여종의 약제(藥材)가 일본(동대사정창원)에 전달(傳達)되었는데
그 가운데 인삼(人蔘)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인삼사(人蔘史)에 대해서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총독부 전매국의
지원(支援)으로 일본인 경찰서장 출신(出身)이며 민속학자(民俗學者)였던
이마무라 토모(いまむら とも 1870~1943)가 펴낸 7권의 연구총서를
참고(參考)할 수 있다.
 
 
 

대구신문 김종현 기자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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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문 ; 김종현 기자

글=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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